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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60)_프린트물_2026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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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10-07 00:02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60)

[ 제3권 제25장 8항 – 제25장 9항 ]


    성경본문: 로마서 8:11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5장 최후의 부활


8항. 몸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

  나는 이렇게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악하고 대담한 자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속일 틈을 남겨 놓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은 귀찮겠지만 불편을 참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논의의 상대로 하는 이 경박한 사람들은 부활이 있을 때에는 새 몸이 창조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되겠다고 느끼는 것은, 오랫동안 부패하여 없어진 시체가 원상으로 회복된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오직 불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몸의 부활을 대망하라고 역설합니다. 바울은 세례를 우리의 미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합니다(골2:12). 성만찬은 우리가 입으로 영적 은혜의 상징들을 받을 때에, 부활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지체를 의에 순종하는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롬6:13,19) 바울의 충고는, 그가 그 후에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한 말과(롬8:11)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전체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발과 손과 눈과 혀를 하나님의 섬기는 일에 바치더라도, 봉사의 열매와 보상에 참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직접 이 점을 확인합니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6:13,14). 더욱 분명한 것은 그 다음에 있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였습니다(고전6:15,19). 그리고 조금 뒤에 구속의 값을 우리의 몸에까지 확대하는 것과 같이(고전6:20), 바울은 부활을 정숙과 거룩에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바울의 몸(갈6:17),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나타낸 그의 몸이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랑하였습니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행14:22),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기치 하에 훈련시키시고 승리의 찬사로 장식하시는 몸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할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을 품는 데 대해서 아무 의혹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시험하는 모든 환난을 맡으시고 환난에는 생명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의식을 통해서 율법 하의 거룩한 조상들에게 이 믿음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셨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매장하는 몸들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이 준비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장례는 왜 생겼겠습니까?


  영생불사의 상징인 향료와 기타 물질은 희생 제물과 같이 율법 하의 가르침의 모호한 점을 완화하려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매장 풍습은 미신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장례에 대해서도 믿음의 중요한 여러 가지 신비에 못지 않게 많이 유의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적은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마26:10) 이유도 확실히, 장례는 모든 것을 썩히고 말살하는 무덤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 갱신의 광경을 그려보게 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장례를 극히 엄숙하게 지키는 것을 족장들도 시인하였거니와, 그런 엄수는 그들이 장례를 믿음에 대한 가치 있는 도움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눈앞에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가치와 종교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그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세밀한 주의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창23:4,19). 즉, 그는 아내의 시체를 부활의 표징으로 장식함으로써 자기의 믿음과 가족의 믿음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은 야곱이 한 일입니다. 그는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희망이, 죽을 때에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자기의 뼈를 그리로 가져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47:30). 묻노니, 그가 새 몸을 입게 될 것이라면, 없어지고 말 흙에 관해서 지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면, 부활 교리와 같이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교리도 없습니다.


  어린이들까지도 “부활”과 “다시 산다"는 말을 이런 뜻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방금 창조된 것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우기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요6:39)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도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잔다”는 말은 몸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묘지를 침소라고 부릅니다.


부활의 모양

  이제 남은 것은 부활의 모양에 대해서 다소의 암시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고전15:51), 우리가 절제하며, 너무 자유롭고 미묘한 사색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습니다. 이 점을 바울은 잘 아는 예를 들어 주장합니다(고전15:39). 사람과 짐승의 육체는 본체가 같으나 성질이 다르며(고전15:39), 모든 별은 같은 재료로 되었으나 그 광채가 다른 것과 같이(고전15:41), 우리는 우리의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고전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는 성질을 버리고 썩지 않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고전15:53-54). 하나님께서는 모든 요소를 마음대로 지배하실 수 있으므로 흙과 물과 불에게 그것들에 의하여 소멸된 것을 모두 복구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도 이 점을 비유로 언급합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26:21).


  그러나 죽은 지 오랜 사람들과 그 날 아직 살아 있을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고전15:51). 죽는 때와 둘째 생명이 시작하는 때의 사이에 간격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순식간에 홀연히”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상태로 살아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은 갑자기 같은 영광으로 변화할 것입니다(고전15:52-53).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죽게 될 신자들을 같은 말로 위로하며, 그 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앞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리라고 합니다(살전4:15-16).


  만일 사도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히9:27) 한 말을 인용해서 반대한다면, 설명은 어렵지 않습니다. 본성이 변할 때에는 죽는 듯한 인상을 주며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린 때에 죽음에 의해서 모두 새로와지리라는 것과, 변화가 갑작스러운 경우에는 몸과 영혼이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서로 잘 부합되는 일입니다.


9항. 불신자의 부활

  그러나 여기서 더 어려운 의문이 생깁니다. 즉 무슨 권리로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도 부활하는 것입니까? 부활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독특한 은혜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정죄를 받은 것을 압니다(롬5:12,고전15:22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서 오셨습니다(요11:25). 그는 모든 인류에게 무차별하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자들이 믿음으로만 받는 것을 완악하고 눈이 어두운 자들이 얻는다는 것처럼 부당한 일이 다시 있겠습니까? 그러나 확고부동한 사실이 있습니다. 한쪽은 심판의 부활로, 또 한쪽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것이며(요5:29).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러” 오시리라는 것입니다(마25:32). 나의 대답은, 우리가 여기 해당하는 일들을 일상 경험에서 보기 때문에, 이 일을 신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전 세계의 유업을 빼앗겼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통 음식도 먹을 자격을 빼앗겼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것은(마5:45) 현세 생활에 있어서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끊임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속한 것이 악인들에게도 풍부하게 베풀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인정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소유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구실이 없도록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놀라운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친절을 체험하는 일이 많고, 경건한 사람들이 받는 복을 훨씬 능가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체험은 그들에게 더욱 엄중한 정죄가 됩니다.


  덧없는 지상의 혜택에 의해서 부활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들이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처음 단절되었을 때에 그들은 마귀의 죽음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의하여 중간 상태가 마련되었고, 그들은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악인이 우연히 부활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지금 주와 선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억지로 끌려가더라도, 그것이 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심판주 앞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멸망하는 것은 가벼운 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주에게서 완악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말한 입장을 지키며,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앞으로 있을 부활을 기다린다고 한 유명한 고백을(행24:15) 고수해야 하지만, 성경은 부활과 하늘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가르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경에서도 복된 생명에 관해서만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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