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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57)_프린트물_2026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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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7-07 01:43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57)

[ 제3권 제25장 1항 – 제25장 3항 ]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5:2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5장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 교리를 주장함, 1-4항)

1항.부활의 소망: 이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가지 문제점

  의의 태양이신(말4: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정복하시고,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딤후1:10).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요5:24), “이제부터...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2: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독생자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 이것은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승리에서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어려운 싸움 가운데서 심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소망의 특성에 대해서 배운 것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롬8:25),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므로(히11:1), 이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가...주와 따로” 거하기 때문입니다(고후5:6).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합니다(골3:3-4). 그러므로 우리의 놓인 처지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딛2:12-13). 따라서 우리는 피로하여 우리의 길을 돌아가거나 또는 우리의 위치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며,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쁨 속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벧전1:8-9).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골1: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됩니다(마6:21).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믿음이 드뭅니다. 우둔한 우리들이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처럼(빌 3:14)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태산 같은 불행이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합니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입니다.


2항.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힘을 준다

  고대 철학자들은 최고선을 열심히 논하며, 심지어 서로 논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최고선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플라톤뿐이었고, 플라톤도 그 연합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 연합의 거룩한 유대에 대해서 배운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압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입니다. 연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목표를 보여주며(빌3:8), 자기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빌3:13) 이 목표를 얻기까지 노력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목표를 열심히 추구해야 하며, 세상에 붙잡혀 태만죄로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빌3:20).


  그리고 신자들이 이 경주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동반자라고 합니다. 그는 도처에서 형태도 없는 폐허를 보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합니다(롬8:19). 아담의 타락이 자연의 완전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후에, 사람의 죄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받게 된 속박은 그들에게 중대한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연히 타락 전의 완전한 상태를 동경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탄식” 하며 “고통”한다고 하였습니다(롬8:22). 이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가(롬8:23) 자신의 부패 속에서 쇠약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적어도 사람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는 무생물들을 모방하지도 못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세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바울은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부릅니다(롬8:23 참조). 우리의 부활의 모든 부분이 이미 완성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에 제물이 되셨으므로(히10:12),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9:28). 어떤 곤란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이 구속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힘을 내야 합니다.


3항.바라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이 문제는 중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정당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고전15:13-14).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는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여 있으며(고전15:30 참조) 참으로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롬8:36,시44:22). 따라서 우리가 양자가 되며 우리의 구원이 실현된다고 하는 복음의 권위는 그 일부뿐만 아니라 전체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무리 시간이 들더라도 싫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 간단한 논의를 이 때까지 연기한 것은,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독자들이 더욱 높은 곳에 오를 줄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생과 영광을 입으셔서, 온 몸이 그 머리(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의 실례로서 우리에게 몇 번이든지 보여주십니다.


  완전히 썩어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영혼 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습니다. 이런 견해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으나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줍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셔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싼 불행 가운데서(고후4:8-9 참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예수를 찢어 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추론합니다(고전15:1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하나의 기존 원리로 인정했습니다. 오히려 각 지체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모든 지체에 완성되어야 할 것이 머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모든 지체들이 모든 점에서 머리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합니다(시16:10,행2:27 참조). 우리도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이 믿음의 일부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완전한 결과는 모든 부패를 면하고 완전한 몸을 다시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보증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언급하며(엡1:20 참조), 끝날에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합니다(빌3:20-21).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골3:4),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 번만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주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을 것을 소생시키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롬8:11 참조).


  나는 지금 간단하게 취급할 뿐이나, 이것은 더욱 자세히 취급할 수 있으며 더욱 찬란한 해설을 할 가치가 있는 문제입니다. 다만 이 얼마되지 않는 말에서 경건한 독자들은 각자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얻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내세의 동참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신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끝으로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요11:25). 이 거울에서 부활의 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과 같이, 이 오랜 기간에 싫증이나 초조를 느끼지 않는다면, 부활은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견고한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생각대로 분초를 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을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그에게 붙은 자”라고 충고합니다(고전15:23).


  우리 모두의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입증되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실이라고 한 것을 유치한 이야기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겁에 질린 여자들이 전해준 이야기, 또 공포심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빛나는 기념품을 성전이나 공개된 장소에서 전시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빌라도 앞에 그 두려운 자태를 나타내시지 않았습니까? 왜 제사장들과 온 예루살렘에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이 정당한 증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약하다고 해서 경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이 주관되어, 공포심에 압도되었던 자들이 무덤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만큼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건한 열성 때문에, 또 얼마만큼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갔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사실에 대한 목격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눈으로 본 일에 대해서 천사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한 말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가 스스로 사실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의 신실성을 우리는 어떻게 의심할 수 있습니까? 일반 사람들과 총독이 풍성한 증거가 제시된 후에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나 다른 표징들을 볼 기회를 빼앗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무덤을 인봉하고 파숫군이 지켰지만(마27:66), 사흘째 되는 날에 시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눅24:3,마28:6,11,27:24 참조). 뇌물을 받은 병정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마28:12-13,15). 이는 마치 제자들이 한 군대라도 제압할 수 있다거나 또는 무기로 무장을 했다거나, 심지어 이런 짓을 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제자들을 쫓아버릴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왜 그들을 쫓아가서 민중의 도움으로 그 중에서 몇 명이라도 잡지 않았습니까? 빌라도는 참으로 자기의 반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였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그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 천사들의 소리가 울렸습니다(마28:6,눅24:6 참조). 하늘 광채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고 천사임을 명백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의심을 제거해주셨습니다(눅24:38).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여러 번 만났고, 그 손과 발을 만져보기도 하였습니다(눅24:40,요20:27 참조). 그들의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행1:3), 드디어 그들의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행1:9). 이 광경은 열한 제자에게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졌습니다”(고전15:6).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살아나신 것뿐만 아니라 최고의 주 되심을 확실히 증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라고(요16:7) 이미 예언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노상에 엎드러지게 만든 것은 죽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으며, 바울은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분이 최고의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행9:4).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유로 스데반에게 나타나셔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셨습니다(행7:55). 이렇게 많은 증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신앙일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어리석은 고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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