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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54)_프린트물_2026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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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4-07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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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54)

[ 제3권 제24장 7항 – 제24장 10항 ]


    성경본문: 요한일서 2:19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7항.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다시 떨어져 멸망으로 급행하는 것은 매일 있는 일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은 하나도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멸망의 자식”만은 제외하셨습니다(요17:12).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매달린 일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진심으로 신뢰해야만 우리는 선택을 굳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라고(요일2:19) 요한은 말합니다. 선택된 자들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표징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신자들에게 복음의 말씀에서 구하라고 권고하는 것과 같은 선택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다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예가 있다고 해서 주의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이며, 그가 그들의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요3:16,6:39 참조). 우리는 조금 뒤에 유다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의 단순한 확신을 금하지 않고, 순전히 우둔하고 육적인 자신을 금합니다. 이런 자신은 거만과 자만과 타인에 대한 멸시를 낳으며,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경외심을 없애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가르칠 때, 유대인들이 제외되고 그 대신에 자기들이 용납되었다고 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무정하고, 교만한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합니다(롬11:18 이하 참조). 그는 또 두려움을 품으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겁을 내며 마음을 흔들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으려고 준비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감이 결코 약화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파벌들을 상대로 말합니다. 교회가 두 파로 갈려서 경쟁과 분열이 생겼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특별하고 거룩한 백성의 자리에 놓였으니, 두려움과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고 경고합니다. 그들 중에는 교만해진 사람이 많았고, 그들의 그러한 자만은 억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희망이 미래에 곧 죽음의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았으며, 우리의 장래를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품은 소망의 성격과 가장 반대되는 생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8항. 일반적인 소명과 개별적인 소명(마22:2 이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신(마22:14)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매우 큰 오해가 있습니다. 위에서 분명히 말한 점을 굳게 지킨다면, 이 말씀에는 모호한 데가 없을 것입니다. 즉,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소명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복음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서(고후2:16 참조), 또 더욱 엄격한 정죄의 기회로서 제시하시는 사람들도 부르십니다. 다른 종류의 소명은 개별적인 것이며, 대개는 신자들에게만 주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을 비추시어, 선포하신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러나 간혹 신자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비추어 그도 참여하게 하시지만, 후에 그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시며 더 심한 맹목으로 벌하시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소수 사람들에게만 바르게 존중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을 어떤 임금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왕은 장중한 연회를 베풀고자 사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여 많은 사람을 초청하나, 수락하는 사람이 심히 적습니다. 각각 일이 있어서 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거절하기 때문에 왕은 할 수 없이 네 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누구든지 부르기로 합니다(마22:2-9). 여기까지는 이 비유를 외면적인 소명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후에 첨부해서, 하나님을 좋은 주인으로 비유하십니다. 주인은 이 식탁 저 식탁으로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면, 합당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 부정한 옷으로 연회의 기쁨을 모욕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습니다(마22:11-13). 나는 이 말씀이, 믿노라고 하면서 교회에 들어왔으나 그리스도의 성격을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이런 치욕을, 이런 암적 존재를 언제까지나 참으시지 않고, 비열한 그들에게 합당한 처분을 내려 그들을 쫓아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었습니다(마20:16 참조). 그러나 이것은 신자들이 자기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할 소명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 소명은 악인들에게도 공통된 것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소명은 중생의 영이 동반합니다(딘3:5 참조). 중생의 영은 장차 있을 기업의 보증이며 확인하는 인인데(엡1:13-14), 그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 이 인을 우리의 마음속에 쳐두십니다(고후1:22). 요약하면, 위선자들이 진정한 경배자들과 같이 경건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자리에서 그들을 쫓아내실 것입니다(마22:13). 이것은 시편에 있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시15:1).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시24:4,15:2 이하 참조).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24:6). 이와 같이 성령은 신자들에게 참으라고 역설하십니다. 또한 이스마엘 자손이 교회 안에 섞여 있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가면을 벗고 수치스럽게 쫓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9항. 유다의 예는 반대 증거가 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예외 즉,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라고(요17:12)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예외에도 해당합니다.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으나 모호한 것은 아닙니다. 유다가 그리스도의 한 양으로서 꼽혀졌던 것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다른 곳에서 그가 사도들과 함께 선택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직무에 관련된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십니다(요6:70). 바꿔 말하면, 그를 사도직에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선택을 말씀하실 때에는 선택된 자들 중에서 그를 멀리 버리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요13:18). 만일 누가 이 두 귀절에 있는 “택한다”는 말을 혼동한다면, 그는 심한 곤란에 빠질 것이나, 그 차이에 주의한다면 사태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가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알 뿐이고, 선택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고 한 것은 위험한 오류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워하며 떨라고 권고하며, 그 이유로서는 우리는 오늘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지만, 앞으로 무엇이 되겠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그가 이 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 줍니다. 그는 선택을 행위의 공로에 의존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심할 이유를 충분히 제공하고, 그들의 마음에 힘을 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신뢰로 전환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자들은 우리가 처음에 한 말의 뜻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바르게 이해하면 예정은 믿음을 조금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견고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끔 우리의 이해 수준에 맞도록 말씀을 조절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겔13:9).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속한다고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생명책에 기록하기 시작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에 의해서(눅10:20)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이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빌4:3). 그러나 에스겔서의 말씀은 선택된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같이 보이던 자들이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표시할 뿐입니다. 시편의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시69:28,계3:5 참조)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10항. 선택된 사람들이 아직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 “선택의 씨”는 없다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양 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출생 직후도 아니며, 모두 동시에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데 따라서 되는 일입니다. 그들이 저 최고의 목자에게로 모아지기 전에는 모두 다같이 황야를 헤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궁극적인 죽음의 멸망으로 돌입하는 것을 특별한 자비로 막아 주시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도 아담의 후손이요, 인류에 공통된 부패한 냄새를 피웁니다. 그들이 순전한 불경건으로, 심지어 절망적인 불경건으로 끌려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돌보시며 손을 그들에게 뻗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날 때부터 일종의 선택의 씨가 심어져 있어서 그 힘으로 그들은 항상 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의 권위에 의하여 지지되지 않으며, 우리의 경험 자체로도 부정합니다. 그들은 몇 가지 예를 들어, 선택된 사람들은 비추임을 받기 전에도 경건 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홈 없는 생활을 했었고(빌3:5-6) 고넬료는 구제와 기도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행10:2). 바울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만 고넬료에 대해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바입니다. 그는 그때에 이미 성령의 조명을 받아 중생했고, 다만 복음의 분명한 계시만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수의 예에서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입니까?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경건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소크라테스(Socrates),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스키피오(Scipio), 쿠리우스(Curius), 카밀루스(Camillus), 등의 고귀한 생활을 보고, 이 사실을 근거로 우상 숭배의 암흑 속에 버림을 받은 사람들도 모두 거룩함과 순결함을 성의껏 추구했다고 추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에는 그들을 명백하게 부인하는 곳이 한 둘뿐이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중생 전의 상태를 묘사한 것을 보면, 이 씨는 한 알도 보이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그 때에 너희는...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9).


  그러나 그들은 이런 말이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런 무지 속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는 거짓말이나(엡4:25) 도적질을(엡4:28)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말은 파렴치한 무고죄가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은 다른 귀절들에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고린도서에는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고전6:9-10) 말한 후에 즉시 이어, 그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런 죄를 짓던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고 그의 영에 의하여 해방을 얻었다고 첨가합니다(고전9:11). 마찬가지로 로마서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습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롬6:19).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롬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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