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52)_프린트물_2026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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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2-02 22:12본문
기독교강요강해(152)
[ 제3권 제24장 1항 – 제24장 3항 ]
성경본문: 로마서 8:30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1-5항)
1항.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것과, 악한 자들의 눈이 어두워지며 마음이 굳어지는 데 대해서 논의해야 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약속의 보편성이 모든 인류를 동등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반박할 때 이미 다소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자신 안에 감추어두시지만, 부르심으로 그 선택을 나타내실 때에는 무차별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8:30). 이것은 그들을 후에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이미 자녀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부르심을 받으면, 이미 선택에 어느 정도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성령을 바울은 “양자의 영”(롬8:15)이라고도 하고, “인치심”과 “미래의 기업에 보증”이라고도 합니다(엡1:13-14,고후1:22,5:5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장차 양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확고하게 인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선포는 선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듣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이런 뜻으로 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우리는 이미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6:46).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17:6). 다른 곳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6:44). 어거스틴은 현명하게 이 귀절을 설명했습니다. “진리(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것이(요6:45) 사실이라면, 오지 않는 사람은 배우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올 수 있는 사람도 오겠다는 뜻을 품으며 그대로 행하지 않는 한 그가 실제로 오리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은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실제로 온다. 그리고 이 결과에 이미 가능성의 유익과 의지의 움직임과 행동의 결과가 나타나 있다.” 다른 곳에서는 더욱 분명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말씀은(요6:45),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고서 내게 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온다면 오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지 않았다. 만일 듣고 배웠다면 왔을 것이다...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들에게로 오도록 가르치신다는 이 가르침은 육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조금 뒤에, “그러므로 이 은혜는 사람의 마음 위에 비밀히 베푸시는 것인데, 강퍅한 마음은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우선 마음의 강퍅함을 제거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서 들을 때....하나님께서는 강퍅한 마음을 없애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겔11:19,36:26)...이와 같이 그들을 약속의 자녀의 그릇으로 만드시며,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신다(13장).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가르치시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람은 모두 긍휼로 가르치시고, 가르치시지 않는 사람은 심판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이 아닌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기’때문이다(롬9:18,14장)”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사람들을 자녀라고 부르시며, 스스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심으로써 가족 안에 받아들이시고 자신과 연합하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성경은, 부르심과 선택이 연결될 때, 이 일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 이외의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누구를 왜 부르시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택에 대해서 묻는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긍휼만 나타납니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이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원하고 달음박질하는 것 사이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통 이해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사람의 소원과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가 돌보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의 도움을 받으면, 구원을 얻는 일에서 그 의미가 부여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 너절한 반대에 대해서 나는 어거스틴의 말로 반박하겠습니다. “만일 사도가 말하는 것이, 주께서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면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말을 돌려서,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이 없으면 긍휼만으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불경건한 말이다. 그렇다면 사도는 모든 것을 주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돌리고, 우리의 소원과 노력에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 거룩한 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그들이 여기서 제기하는 궤변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노력과 원하는 것이 없다면,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의 일부를 사람의 노력에 돌리는 것을 보고, 그들의 오류를 이 문장의 전반부에서 비난하고, 후반부에서 구원의 전체를 하나님의 긍휼에 돌립니다. 또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부르심만을 끊임없이 선포하지 않습니까?
2항. 부르시는 방법은 부르심이 은혜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준다
그뿐 아니라, 부르심의 성격과 적용까지도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합니다.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의한 조명입니다. 우리는 예언서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자비가 이방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때에 그를 어떤 곳에서 취하셨는가를 회상시키십니다. 즉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고 하십니다(수24:2-3 참조). 하나님께서 가치 없는 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 그의 인애가 거저 주시는 것임을 충분히 또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증거를 배척하기 때문에 더욱 엄중한 심판이 그들 위에 내려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악인들에게는 그의 영의 효과적인 역사를 허락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소명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입니다. 여기 요한의 말이 해당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4:13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값없이 자신을 내어 주셨을 때에, 육은 적어도 응답했노라고 하여 그 일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육에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없다고 밝히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은 각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택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점에 대한 현저한 실례를 누가의 보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말씀으로 교훈을 받은 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습니다(행13:48). 부르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만이 주관하고 있는데 부르심이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부정한다면,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입니까?
3항.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에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선택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의 협력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위를 점합니다. 이는 우리가 받는 것은 믿는 능력뿐이고, 믿음 자체는 아니라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은 생각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를 그렇게까지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떤 이유로 선택을 믿음에 의존시킵니다. 마치 믿음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선택은 의심스럽고 효력이 없게 된다는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관계된 범위내에서는 선택이 확인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이 감추어져 있다가 밝히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이 말의 뜻은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지금 확인된다는 것 - 이를테면, 지금 인침을 받는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라야 선택이 효과를 나타내며, 여기서 그 타당성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물론 복음에서 확신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까지 파고들어가려고 한다면, 그 깊은 바다가 우리를 삼켜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결정을 우리에게 밝히 보이실 때, 우리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며 결과가 원인을 압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대로 우리는 비추임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데, 이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시어 선택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이상 어리석고 부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시에 우리는 자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믿고 간구하리만큼 우리의 신뢰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강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까우며 우리 입과 마음에 있는(신30:4)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름 위를 떠돌아다니려는 잘못된 갈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솔한 태도를 침착한 믿음으로 억제하며, 하나님께서 외면적인 말씀으로 우리에 대한 그의 감추인 은혜를 충분히 증거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풍부하게 물을 배급하여 마시게 하는 그 수도관이 우리가 그 원천에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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