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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16)_프린트물_2024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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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1-02 23:20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16)

[ 제3권 제14장 12항 – 제14장 17항 ]


       성경본문: 누가복음 17:10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와 성자들의 잉여 공로설을 검토, 반박함, 12-21항)

12항. 반대자들의 핑계

  이 문제에 관해서 스콜라 학자들이 도피 수단으로 사용하는 핑계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행에는 의를 얻기에 충분한 고유의 가치가 없지만, “받아들이는 은혜”인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행위에 의한 의가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행위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일평생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범한 불법은 잉여 업적에 의해 보상된다고 합니다.


  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에 불과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값 없이 베푸시는 선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무죄를 우리에게 입히시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인정하시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며 순결하며 결백하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완전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대 앞에 나타나며 우리를 보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의를 받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끊임없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 순결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우리의 추악과 불결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묻힌 듯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오면 옛 사람이 죽어 분명히 파괴된 우리를 선하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셔서 새 아담과 함께 복된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의 날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썩지 않는 몸을 받아,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고전15:45 이하 참조).


13항. 잉여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중대성을 오해하였다

  만일 이런 일들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자체로는 확실히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실 만한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행위 자체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의 용서를 받는 때만은 예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개의 행위에 대해서 그 보상으로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의 일들을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레18:5). 그리고 모든 일을 꾸준히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 유명한 저주의 말씀을 하셨습니다(신27:26,갈3:10). 이런 말씀은 부분적인 의라는 공상을 철저히 논박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것 이외의 의를 하늘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잉여 업적”이 충분한 배상을 제공한다고 하는 그들의 상습적인 모호한 말은 건전치 못한 생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벌써 쫓겨난 자리로 항상 되돌아가지 않습니까? 즉, 부분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입장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정하지 않을 일을 그들은 뻔뻔스럽게 사실인 듯이 전제합니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으면 행위에 의한 의를 전연 인정하시지 않는다고 주께서는 자주 확언하십니다. 우리에게 의가 없으면서도 모든 영광을 빼앗긴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 즉, 하나님께 절대로 굴복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 몇 가지 사소한 행위를 자랑하며, 다른 보속으로 자기에게 없는 의를 사려고 하는 우리는 얼마나 패악합니까?


  보속이란 생각은 이미 철저히 분쇄되었습니다. 우리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무의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악한 것으로 보시는지를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모든 의를 한데 뭉치더라도 죄 하나를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한 번 범법한 것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그 결과로 동시에 구원을 회복할 능력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우리는 압니다(창3:17). 그러므로 사람은 보속을 치르는 능력을 빼앗겼습니다. 자기의 보속 능력으로 몸을 단장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원수에게서 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거나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가 있다고 단정하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인정하시려면, 먼저 우리가 죄가 가려지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값 없이 주시는 것이며, 보속을 밀어 넣는 자들은 그 은혜를 악하게 모독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를 모범으로 삼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경주를 하며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야 합니다(빌3:13-14).


14항.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또 완수할 수도 없다

  잉여 업적을 자랑하는 것 - 이것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17:10)는 교훈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가장이나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마음에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불필요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드려야 할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진지하게 깨달으며 생각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 이것은 옳은 명령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종이며, 율법의 의무를 다하는 데 정신과 몸을 다 바치더라도 그 전부를 이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모든 의로운 행실과 그 이상의 행실도 이 모든 일들 중의 하나에도 해당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각 사람은 이 목표에서 심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책임 분량 이상으로 무엇을 축적했노라고 감히 자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혹은 항변하기를, 비록 나는 필요한 의무들의 일부를 이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무들보다 더 많이 행하도록 노력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할는지 모르나, 이런 말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데 공헌할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율법의 일부라면,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을 자발적인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5항. 우리와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 업적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자랑한 것을 부당하게 적용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했노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 대해서 의무를 다했을 뿐 아니라, 의무의 한계를 넘어 보수도 받지 않고 봉사를 하였습니다(고전9:1 이하).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행동은 약한 형제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한(고전 9:12) 그 이유에 유의하지 않습니다. 거짓된 악한 일꾼들이 가장된 친절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 하며, 그 위험한 사상을 퍼뜨리며, 복음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나 또는 그런 흉계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할 수 있으면서도 남에게 손해가 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도는 주를 위해서 의무 이상의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맡은 지혜 있는 청지기는 그런 일을 회피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바울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끝으로, 가령 이런 이유가 명료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크리소스톰이 한 말은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노예의 소유물과 같은 처지에 있다 - 즉, 그것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비유에서 이 점을 숨기시지 않습니다. 종일토록 여러 가지 노동을 하고 저녁 때에 돌아온 하인에게 우리가 무슨 감사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눅17:7-9). 그는 우리가 감히 요구하지 못할 정도로 부지런히 일을 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종이라는 처지에 요구되어지는 일 이상의 것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와 그의 능력은 온전히 우리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따위의 잉여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잉여 업적은 무가치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도 없으며 시인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공로를 하나님 앞에 제출한다면 용납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잉여 업적이 있다면 그 의미는 한 가지뿐입니다. 즉, 예언서에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라고 한 것입니다(사1:12). 그들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런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55:2). 참으로 이 한가한 랍비들이 그늘진 안락 의자에 앉아서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 심판자가 심판대에 앉으실 때 그런 허무한 의견들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심판대 앞에 가서 우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확신을 추구해야만 하고 학교나 길목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16항. 행위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

  이 점에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해독을 머리 속에서 뽑아버려야 합니다. 즉, 행위의 의를 믿어서는 안 되며, 행위를 자랑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결백에서 향기를 얻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취를 풍긴다고 가르침으로써, 항상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그의 진노를 일으킬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최고 심판자의 자비를 찾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청산할 것을 요구하신다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다윗은 말합니다(시143:2). 욥이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이라고 할 때에(욥10:15), 그는 하나님의 최고의 의에 - 천사들도 응답하지 못하는 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엄격한 법도 앞에서 욥은 무용한 저항을 하지 않고 기꺼이 굴복할 뿐 아니라, 그가 체험한 의는 모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즉시 시들어 버릴 것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신뢰를 없애버리면 자연히 모든 자랑도 사라질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 앞에서 붕괴될 때, 누가 행위에 의가 있다고 믿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가 부르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함을 얻고 자랑하리라”고 합니다(사45:25).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사61:3) 하는 말은 진리입니다. 행위를 믿고 안심하는 일이 전연 없으며, 행위의 영광을 기뻐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정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항상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릇된 자신감에 속아 교만하게 됩니다.


17항. 행위는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원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위는 어떤 원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 물론 질료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얻으셨습니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지도 명백하게 말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엡1:6 참조)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시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롬3:24). 우리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질료인이 여기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롬3:25)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을 가르칩니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롬3:26)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인을 가리킵니다. 겸해서 이 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었으며, 믿음으로 받게 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엡1: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병행하여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이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반대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은혜로서의 이 의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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